수십 통 전화벨에 여론조사 포비아...작년에만 2700만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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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통 전화벨에 여론조사 포비아...작년에만 2700만대 울렸다

by honeypig66 2025. 4. 17.

수십 통 전화벨에 여론조사 포비아…작년에만 2700만 대 울렸다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여론조사에 시달린 시민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

2024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의 휴대전화와 유선전화로 걸려온 여론조사 관련 전화는 무려 2,700만 건이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하루 평균 74,000건 이상이며, 사실상 전국민이 적어도 한 번쯤은 여론조사 전화를 받은 셈이다. 선거가 있었던 해라지만 이 정도의 수치는 ‘포화’ 그 자체였다. 이런 과도한 여론조사 전화로 인해 시민들 사이에서는 ‘여론조사 포비아’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단순한 피로감을 넘어, 여론조사 자체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 "하루에만 세 통, 밤 9시 넘어서도 울려요"

직장인 김모(34) 씨는 지난해 총선 직전에 하루에 세 번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다. 낮에는 회사 회의 중이었고, 퇴근 후 집에서 쉬고 있을 때도, 밤 9시가 넘어서도 전화벨은 울렸다. “처음에는 궁금해서 받았는데, 자꾸 반복되니까 짜증이 나더라고요. 번호를 차단해도 다른 번호로 계속 오고요.” 김 씨는 결국 여론조사 번호로 알려진 몇몇 국번을 통째로 수신 차단해버렸다.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여론조사에 시달린 시민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는 “여론조사 전화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모르는 번호는 아예 받지 않는다”, “하루에도 여러 번 와서 공포스럽다”는 등의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여론조사 포비아’는 단지 개인적인 불쾌감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에 여론조사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유발하고 있다.

■ 여론조사의 홍수, 왜 이렇게 많아졌나?


전문가들은 여론조사 전화가 많아진 주요 원인으로 정치권의 과도한 의존과 여론조사 기관의 난립을 꼽는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후보자나 정당은 표심을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기 위해 여론조사를 활용한다. 과거에는 언론사나 정당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최근에는 민간 여론조사 기관의 수가 급증하면서 경쟁적으로 조사에 나서는 추세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이하 여심위)에 등록된 여론조사는 무려 4,000건 이상이었다. 이는 2020년 총선 대비 약 1.8배 증가한 수치다. 여심위는 여론조사의 투명성을 위해 반드시 등록하게 되어 있지만, 전화 건수나 시도 횟수에 대한 규제는 사실상 없다.

게다가 RDD(Random Digit Dialing, 무작위 전화걸기) 방식은 유무선 번호를 무작위로 생성해 전화를 걸기 때문에 수신자가 조사 참여 여부를 미리 알 수 없고, 특정 번호를 차단해도 새로운 번호로 계속 걸려오는 구조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피할 수 없는 스팸”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 여론조사 신뢰성, 정작 하락세

이처럼 여론조사 전화가 과도하게 늘어나자 정작 응답률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여심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체 여론조사 중 평균 응답률은 10% 이하에 머물렀다. 이는 2016년 19%, 2020년 14%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온 결과다. 즉, 100명에게 전화를 걸어도 실제로 응답해주는 사람은 10명도 안 되는 셈이다.


이런 낮은 응답률은 표본의 대표성에 심각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바쁜 직장인이나 고령층, 또는 정치에 무관심한 층은 응답을 회피하는 경향이 크고, 반면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층이나 특정 성향을 가진 사람들만이 응답에 나서는 ‘응답자 편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사 결과의 신뢰도를 낮추고, 실제 민심과의 괴리를 초래할 수 있다.


정치 컨설턴트 정지훈 씨는 “여론조사 자체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늘어나면, 조사결과가 발표돼도 그것을 믿지 않게 된다”며 “결국 여론조사는 아무리 정밀하게 설계해도 사람들의 참여 없이는 무의미해진다”고 설명했다.


■ ‘여론조사 규제법’ 필요성 제기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여론조사 전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반복된 ‘여론조사 과열’ 양상이 유권자의 피로도를 극심하게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법적 규제 또는 가이드라인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국회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여론조사 전화 횟수 제한, 심야 시간대 금지, 사전 동의 제도 도입 등의 내용을 포함한 ‘여론조사 개선법’을 발의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일부에서는 여론조사의 자유를 법으로 제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 침해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의 선거여론조사 제도개선 공청회가 2024년 1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이은정 박사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평온할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며 “적어도 심야시간과 특정 빈도 이상으로의 무작위 전화는 자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디지털 방식의 대안 필요

과거와 달리, 이제는 전화 이외에도 온라인, 모바일 앱,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한 방식의 여론 수렴이 가능해졌다.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에 따라 여론조사 방식 역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MZ세대의 경우 전화보다는 텍스트나 앱을 통한 설문 참여에 더 익숙하고 응답률도 높다.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메일 기반 설문, 앱 알림을 활용한 조사, 혹은 SNS 상에서 이루어지는 참여형 여론조사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에도 한계는 존재하지만, 지금처럼 전화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여론조사보다는 시민의 부담을 줄이고, 응답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평가다.

정치학자 김대성 교수는 “여론은 국민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도구지만, 그 방식이 잘못되면 외면받게 된다”며 “지금은 단순한 수치 집계가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로서 여론조사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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