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8년은 '성당의 담장' 안에서 흐르는 시간이었다. 새벽 4시, 묵상으로 시작해 타인의 고해성사를 듣고, 누군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보낸 시간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거룩한 봉사'라 불렀다. 그러나 내가 그 담장을 넘어 세상 밖으로 나온 날, 그 18년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1. "사회 경험이 없으시네요"
세상에 나와 처음 도전했던 것은 작은 가게의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면접실에 앉은 사장은 내 이력서를 대충 훑어보더니, 펜 끝으로 종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력서가 왜 이렇게 비어있어요? 18년 동안 성당에만 계셨네. 이건 사회 경험이라고 볼 수 없는데. 우리 가게는 바빠요. 사회 경험이 좀 있는 사람을 써야지, 신부님처럼 평생 기도만 하신 분은… 힘들 것 같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면접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18년 동안 수백 명의 고해성사를 들었고, 죽음을 앞둔 사람의 손을 잡아주었고, 가정이 무너진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을 사회 경험이라 부르지 않았다. 사장의 눈에는 내가 '생산성 없는 인간'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날 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며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내가 배운 사랑의 언어는, 이 세상에선 단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2. 사람 얼굴이 무서워졌다
세상의 냉정함은 나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돈은 없었고, 내가 가진 경력은 부정당했다. 그러자 공황이 찾아왔다. 지하철 2호선, 꽉 찬 객차 안이었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순간, 그 얼굴이 사람이 아니라 나를 심판하려는 괴물처럼 보였다. 18년 동안 사람을 사랑하라고 설교했던 내가, 이제는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떨고 있었다.

3. 죽으려고 했던 그날, 내가 놓쳤던 것
바닥이라는 말은 흔히 쓰지만, 진짜 바닥은 달랐다. 통장에는 돈이 없었다. 직장도 없었다. 신부도 아니었다. 친구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미안했다. 나는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정말로 끝내려고 했다. 삶이라는 책을 덮어버리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아주 작게 고개를 들었다.
"정말 끝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지금의 고통만 끝내고 싶은 걸까?"
생각해보니 나는 평생 다른 사람은 살리려고 애썼지만, 정작 나 자신은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다. 신부로는 살아봤지만, 김덕원으로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4. 세상이 가르쳐준 마지막 수업
세상은 냉정했다. 기도한다고 월세를 내주지 않았고, 사랑한다고 통장 잔고가 채워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또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사람은 실패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8년 신부 생활도, 주식 실패도, 공황장애도, 죽음의 문턱도. 지금 돌아보면 모두 나를 무너뜨린 사건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게 만든 사건이었다.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5.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렇게 힘든 일을 겪고 어떻게 버티셨어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사람 많은 곳은 불편하고, 여전히 미래가 두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인생은 한 번 무너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양병원에서 보낸 시간, 주식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시간, 공황으로 사람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시간. 그 모든 시간은 내 삶에서 지워야 할 실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누구인지 다시 배우게 만든 시간이었다.
지금 나는 거창한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고,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8년 동안 신부로 살았다. 그 뒤에는 실패한 사람으로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비로소 김덕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평생 배워야 했던 가장 어려운 공부였는지도 모른다.

💡 저의 이전 기록들이 궁금하시다면
저는 이번 글을 시작으로 앞으로 저의 모든 이야기를 이곳에 차곡차곡 담아내려 합니다. 저라는 사람의 생각이 빚어지게 된 지난 18년의 사제 생활과, 멈춤의 시간이었던 2년의 요양 생활에 대한 기록들도 함께 남겨두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사제 18년의 통찰: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심리 기제
- 멈춤의 미학: 2년의 요양 생활, 멈춰 서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앞으로 나눌 이야기
이 글은 제가 세상 밖으로 나온 뒤 겪었던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이 공간에서는
✔ 신부를 그만둔 뒤 처음 만난 세상의 냉정함 ✔ 공황장애가 오면 사람 얼굴도 무섭다 ✔ 주식으로 전 재산을 잃고 알게 된 한 가지 ✔ 요양병원에서 맞이한 두 번째 봄 ✔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어느 날 ✔ 가난은 돈보다 마음을 먼저 무너뜨린다 ✔ 죽으려고 했던 그날 내가 놓쳤던 것
에 대한 이야기를 차례대로 나누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실패담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다시 일어설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