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몇 달 동안 나는 거의 멍하니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앞선 요양원에서 있었던 일로 내가 어느 정도로 정신이 흐려져 있었는지,
지금의 나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
엉덩이에는 욕창까지 생겼다고 했다.
사람이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말을 알아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내고 일반병실로 올라왔다.
그때 내 코에는 콧줄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왜 코에 이런 것이 들어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것을 빼면 안 된다는 것도 몰랐다.
그때 나는 꿈을 참 많이 꿨다.
정말 많이 꿨다.
어떤 꿈에서는 실제로 가본 나라에 가 있었다.
또 어떤 꿈에서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를 내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 것인지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오셨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이었다.
8층 계단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오셨나?’
그 소리가 아버지가 술 한잔하시고 집에 들어오실 때 내던 소리와 비슷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오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 정도로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무너져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고,
지금이 언제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자꾸 콧줄을 뺐다
그때 나는 자꾸 콧줄을 뺐다고 한다.
간호사들이 다시 끼우고,
나는 또 빼고.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뺐다.
왜 빼면 안 되는지도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게 내 식량줄이었다는 것을.

내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까 코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조차 몰랐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자꾸 빼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 처참하기도 하다.
살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병원으로 외진을 갔다 왔다
그 후 다른 큰 병원으로 외진을 갔다.그리고 그곳에서 정식으로 진찰을 받았다.
마침내 의사에게서 콧줄을 빼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내게는 아주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내 재활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내 몸을 되찾기 시작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병원 생활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나는 자꾸 일어나려고 했고,
간호사들은 나를 못 일어나게 했다.
나는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간호사들은 아직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엄청나게 싸웠다.
지금 생각하면 간호사들도 나를 보호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것을 이해할 만큼 정신이 돌아온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왜 못 움직여?’
라는 생각뿐이었다.
휠체어를 얻기까지
그렇게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휠체어를 받았다.
휠체어 하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계속 옮겨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자유였다.

그다음에는 화장실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혼자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또 싸우고,
또 허락을 받고,
마침내 화장실을 혼자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다음에는 워커였다.
또 조금씩 허락을 받아냈다.
휠체어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워커로.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아니었다.
그 하나하나가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간병인이 없는 병실로
그리고 또 하나를 해냈다.
간병인 없는 병실로 옮기는 것.
누군가의 도움 없이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면서 가능해졌다.
나는 그렇게 아주 천천히 자유를 얻었다.
처음에는 눈을 뜨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이,
휠체어를 타게 되고,
혼자 화장실에 가게 되고,
워커를 잡고 걷기 시작하고,
마침내 간병인의 도움 없이 지낼 수 있는 병실로 옮겨갔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재활이었다.
거창한 운동 프로그램만이 재활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되찾는 것.
그게 나에게는 재활이었다.
그리고 나는 파산을 꿈꾸기 시작했다
몸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빚은 어떻게 하지?’
그때부터 개인파산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몸을 다시 움직이는 것과 함께,
내 삶도 다시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 삶이 거의 끝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몸도 무너졌고,
경제적으로도 무너졌고,
사회적으로도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몸을 하나씩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아주 조금씩 이런 생각이 생겼다.
‘나도 뭔가 다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첫 번째가 파산이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받았다
내게 조금씩 자유가 허락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마침내 전화기를 받았다.
여동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때의 나는 아직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화기를 손에 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달랐다.
내가 직접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
내가 직접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큰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전화가 내 삶의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파산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 빚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디에 물어봐야 하는지도 몰랐다.
파산과 면책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고,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시 세상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뜬다는 것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미래를 보지 못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다시 걸을 수 있을지도 몰랐고,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빚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한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었다.
그냥 하나씩 했다.
눈을 떴고,
몸을 움직였고,
콧줄을 뺐고,
휠체어를 탔고,
화장실에 혼자 갔고,
워커를 잡았고,
간병인 없는 병실로 옮겼다.
그리고 전화기를 받았다.
그렇게 하나씩 내 것을 되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재활이라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무너진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을 하나씩 되찾는 것.
나는 그렇게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부터였다.
그리고 조금씩 생활을 되찾았다.
그다음에는 세상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삶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개인파산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파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전에 있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다시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① 📖 18년 신부였던 내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
부제: 공황장애, 파산, 그리고 무너진 삶 끝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
2026.06.21
→ 이 글에서 말한 ‘다시 눈을 뜬 뒤’의 삶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보여주는 글입니다
② 📖 신부였던 내가 처음 정신과 상담실 문을 열던 날
부제: '십자가의 성토마'라 불리던 완벽주의자가 무너진 자리에서 만난 것
2026.06.22
→ 18년 동안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듣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무너짐을 마주했던 순간으로 이어집니다.
③ 📖1부. 살아났는데, 그럼 내 빚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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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시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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